"부흥이 오는 소리", (행 2:1-4)

성경기록 가운데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오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죄인인 우리와 더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지요.
처음에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자와 창조물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왕과 백성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발전하다가, 급기야는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내주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지요. 구약성도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던 놀라운 일이 초대교회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순한 역사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흥’에 대한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지요. 부흥은 ‘revival’. 즉, ‘회복’ 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성경에는 이 단어가 총 13번 기록되어 있으며,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쇠퇴한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개혁적 의미에서의 회복을 가리키고(창45:27/삿15:19/왕상17:22/왕하13:21/시138:7/사57:15/호14:7/롬7:9/롬14:9), 다른 한 가지는 '죄로 죽어있던 영을 되살려 낸다'는 의미에서의 회복을 가리킵니다(느4:2/시85:6/호6:2/합3:2). 즉, ‘부흥’에는 성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영적 회복과 불신자들의 죽은 영을 되살려내는 영적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숫자나 크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 때문에 구원에 안주한 나머지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은 에스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장했듯이 '이 시대가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복음이 더 이상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겔37:11) 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으며 우리로 말하건대 우리 몸의 부분들은 끊어졌다, 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이 맞춰지고 거기에 살과 근육과 피부가 다시 붙어 되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환상은 다시 회복될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때도 아브라함의 때도 인류는 지금처럼 늘 타락해 왔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복음은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부류는 일루미나티나 공산주의를 들먹이며 마치 자신들의 도움 없이는 복음이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할 것처럼 거들먹 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미 마귀가 하나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교만한 자들이며, 우리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부흥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을 이기는 데 있습니다. 주전 700년 전에 호세아가 전했던 예언을 보십시오.
(호6:1-2)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시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시리라. 이틀 뒤에 그분께서 우리를 되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
호세아는 예수님께서 셋째 날에 일으켜지실 때 부활하는 사건이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마27:50-53)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그분의 부활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믿던 신약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진정한 부흥의 조건이자 소망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이 승리의 메시지는 곧장 지옥에 까지 전달되었습니다(벧전3:19).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이 바로 이 승리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문제는 탐욕도 타락도 불순종도 아닙니다. 그것은 늘 있어 왔습니다. 진짜 문제는 부흥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흥이 오는 소리를 성도들이 달가워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한 세대를 섬기다 가는 존재들입니다. 부흥이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섬길 수가 없습니다. 단지, 한 세대를 걸쳐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부흥은 시대적 사명입니다. 하지만 부흥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할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갑작스럽게 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입니다(행2:1-4).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 결연한 의지로 모였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강력한 부흥의 소리와 함께 임재하셨습다. 그 임재는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달케 하는 뇌관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부흥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한 마음으로 모인 곳
첫째, 오순절 사건은 120명의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을 때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에 그들이 다 한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더라.”(행 2:1)
그렇습니다. 부흥은 거룩한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을 때 임했습니다. 성도가 어디에 모였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좁디좁은 그곳에 성도가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성도가 모인 그 장소를 성경은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고 합니다. 신약 시대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시대 부흥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시편 133편을 보십시오.
(시 133:1) (다윗이 지은 시, 위로 올라가는 노래) 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 133:2) 그것은 마치 수염 곧 아론의 수염 위로 흘러내려 그의 옷자락까지 내려간 머리 위의 귀중한 기름 같고
(시 133:3) 헤르몬의 이슬과 시온의 산들에 내린 이슬과도 같도다. {주}께서 거기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원한 생명이로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복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복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신약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이신 성령님의 임재를 받았습니다. 그 임재는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된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은 교회와 함께 새로운 경륜을 여셨습니다.
여러분. 신약 시대에 복의 근원은 바로 교회입니다. 부흥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쇠퇴하고 죽은 영혼들을 회복시키고 살려야 하는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부유하지도 사회적 명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비좁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한 마음으로 부흥을 위해 모였다는 것. 이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부흥을 위한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성도들은 교회 크기나 모인 사람들의 숫자로 부흥의 가능성을 보지 않았습니다. 부흥의 조건은 결코 크기나 장소 혹은 숫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기도하는 교회에 부흥을 약속하신 하나님
이제 그들은 부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날에도 적은무리의 성도들이라도 한 마음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부흥을 간절히 원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교회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20세기가 막 시작되었던 1904년. 영국의 웨일즈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유럽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북남미 등 전 세계로 번져나갔습니다. 처음 2년 동안 이 나라들에서 약 5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웨일즈 대부흥의 뇌관이 된 사람은 ‘이반 로버츠’라는 영국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경건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그는 13살이 되던 때부터 날마다 갱도 안에서 일하며 하나님께 부흥을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27살이 되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부흥을 위해서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를 굴복시켜 주옵소서. 그리고 저를 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날 밤 성령님은 이반에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분이 임재하자, 이반의 마음속에는 끝없는 평강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피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거룩한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지옥으로 갈 영혼들에게 대한 연민에 휩싸여 한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이 우리 주님의 눈물이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부흥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굴복시켜 달라는 요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이반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작정할 때 하나님도 작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하나님 저를 굴복시켜주옵소서!”라고 기도했지, 결코,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굴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수동적인 기도에는 언제나 자신의 나태함에 따른 결과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곤 합니다.
우리가 진정 부흥을 원한다면, “하나님. 저를 쳐서라도 저를 굴복시켜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뜨거운 마음을 품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큰 소리로 설교하는 사람이 뜨거운 사람이 아닙니다. 낙타와 같은 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3.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두 번째로, 부흥은 120명의 성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갈구할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로 응답되었습니다.
(행 2:2)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고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에 그것이 가득하며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하신 성령님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급하게 반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부흥을 요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급하게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데에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지금 이 시간에도 듣길 원하십니다. 그 기도가 진정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이 시대 가운데 그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 하실 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은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한 만큼 우리가 확실하게 알도록 응답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바람같은 소리로 임하실까요? 에스겔서 37장 9절을 보십시요.
(겔37:9)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오 숨아,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이 살게 하라, 하라.
여기에서 바람은 히브리어로 ‘르아흐’라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신 자신의 숨. 즉, '하나님의 영'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임하면 죽었던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납니다. 즉, 하나님의 숨은 죽은 혼을 살리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이 바람이 성도들이 모인 마가의 다락방에 가득했습니다. 바람은 각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것으로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침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신비한 그 바람(하나님의 숨)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숨을 나누기 전까지 쉬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맡은 부흥의 실체는 하나님의 숨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의 숨을 나누기 위해서 보낼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을 때 즉각,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은 이사야와 같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보냅니다. 우리는 언제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사도행전 2장 3절에 두 번째로 임재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3절)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하나님은 바람처럼 오셔서 이 번에는 각 사람에게 불의 혀같이 임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불의 혀’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거룩한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불의 혀는 특정한 사람한테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이 장면은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이 부흥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을 그들에게 나눠야 합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합니다(겔 2:7). 절제해선 안 됩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는 의무나 성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전하십시오. 전하는 가운데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혼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4. 결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신분이 높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이 이스라엘 전역과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열외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사건은 그들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기꺼이 자신들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부흥을 위해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부흥이 오는 소리는 갑작스럽게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 그분의 방법으로 찾아 옵니다. 그것은 성경과 교회사가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반드시 부유한 자나, 대단한 명성을 가진 자나, 혹은 수많은 무리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가운데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과 교회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16세기 때 하나님은 마틴 루터라는 단 한 사람만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켜 교회 부흥을 주도하셨습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대각성 운동’ 은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되어 모든 개신교가 회심하는 대단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목사 한 명을 통해서 인디언들을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계속해서, 앞서 소개해드렸던 20세기 초 '웨일즈 대부흥'은 '이반 로버츠'라는 20대 청년 한 사람에 의해서 전세계가 뒤집혔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타락해도 부흥은 포기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포기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이 써가신다는 점을 놓치지 마십시오.
부흥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첫째,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 부흥의 도구로 삼아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셋째, '사람의 생각을 멀리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노라!'고 작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줄곧 이런 교회와 성도들을 사용해왔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시대 가운데 이런 교회와 성도가 이 한국 땅에서 많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며, 아울러 또한 우리 새우물침례교회가 그렇게 사용되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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