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말씀/목회칼럼

기독교 사회화의 위험성

새우물침례교회 2023. 8. 12. 17:24

기독교 사회화의 위험성

역사학자들은 핵폭탄보다도 무서운 것은 정치와 종교의 결탁이라고 말합니다.
 
중세(10~12th) 카톨릭은 ‘카톨릭 사회화’를 위해서 200년간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육 했고, 이슬람 극우세력은 ‘이슬람 사회화’를 위하여 무차별적 테러를 자행해 왔습니다(2000년~2014년까지 약 36,000건의 테러 자행). 그리고 이젠 기독교가 ‘기독교 사회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성도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념이 복음보다 강조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세상은 어디까지나 긍휼의 대상이지 개혁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일 세상이 개혁의 대상이었다면 결코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눅20:25) 라는 말씀으로 교회와 세상의 분리를 언급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비단, 이것은 세상도 헌법으로 정해 놓은 바입니다. (헌법 제20조 제1항과 제2항)


* 헌법 제20조 ①, ②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하지만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 이념이 기독교의 정의인양 진리를 이념과 동일시 하며 성도들 중에서 자신의 이념과 다르면 '수구 꼴통' 이니, '빨갱이'니 하는 수식어로 성도들 간에 분열을 획책합니다. 이 때문에 연약한 성도들은 이념과 진리 사이에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역사적 배경은 논외로 하고 저는 요한일서 5장 19절을 통하여 그 원인을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요일 5:19)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아느니라.
  
  
1. 성도의 소속과 신분
 
(요일5:19)의 전반부는 성도의 신분과 소속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고 했습니다(딤후 2:3). 군인이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관등성명(계급과 이름)'을 대는 방법입니다. 이는 군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중에 있는 군인이 자신의 신분과 소속을 분명히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목숨을 위해 상의는 아군의 군복을 입고, 하의는 적군의 군복을 입은 병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총을 맞고 쓰러질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의 신분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롬 8:15,17). 성도는 더 이상 마귀의 자식도, 이 땅에 속한 존재도 아닙니다. 하늘의 왕국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왕국 백성이 된 성도는 어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으로 들어간 존재입니다(벧전2:9). 그런데 왜, 세상 가치를 진리보다 더 크게 강조하며 세상과 친교를 맺고 있단 말입니까? 세상이 어둠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과 친교를 맺고 있다면 그들의 가치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요한일서 5장 19절은 "세상이 사악함 가운데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사악함이 이 세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악함의 한 가운데 놓여 있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이미 세상이 사악함에 잠식되어 있단 말입니다.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아느니라”


 세상 지식이나 철학, 전통과 이념들. 이것들은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유효한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왕국은 영원합니다(시119:89;사40:8;히7:28;벧전1:25). 그러므로 오직 성도에게 있어서 이념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왕국에 속한 교리에 있습니다. 


2. 성도의 가치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사회화의 함정에 빠지는 두 번째 원인을 계속해서 논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도의 가치와 이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망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의 기초가 흔들려 합리화된 새로운 가치관(frame)을 갖게 됩니다.


(약 1:6)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지니라. 흔들리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나니
 
예수님의 공생애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메시아를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만든 전통으로 말씀을 대치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마15:3,6;막7:9,13).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아는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정치적·종교적 독립을 보장해줄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단 정치·종교적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하고 보호하기 바빴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세상 가치를 성경보다 우선시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은 과정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자신들의 신념 만을 앞세웁니다. 그 신념은 진실을 떠나서 자신들이 주장했던 바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간의 자신들의 인생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말기에 더욱 긴밀하게 정치와 결탁합니다. 사실 이념 그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그 신념 끝에 있는 이익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노림수 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정치적 수단일뿐입니다. 그들에겐 오직 목적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저는 사도 바울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부름 받기 이전에 세상 모든 지식과 철학에 능통했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이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포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고전 2:2)
 
이것이야 말로 성도가 지녀야 할 진정한 가치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공급해주시고 성도의 교제 가운데 평등한 위치를 제공해 줍니다. 그것은 물질이 주는 자유나 법으로 강제하는 평등도 아닙니다.
 
이 땅의 정의는 이익이지만, 기독교의 정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땅의 이념(자유와 평등)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게되면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16세기 중세 카톨릭 '면죄부 사건'입니다. 
 
알브레이트는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선거비를 탕진했습니다. 대주교로 당선된 그는 빚을 갚기 위해서 교황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은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 받는다”라는 말로 면죄부를 판매케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교리로 채택했고, 사람들은 그 비상식에 농락당하고 말았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장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도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의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가짜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시장은 짝퉁 메이커에게 잠식 당했고, 정보는 가짜 뉴스에게, 교회는 거짓 대언자들에게 잠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진리를 더욱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철학은 ‘십자가의 도(道)’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가치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의무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며, 성도의 전통은 ‘주의 만찬’ 그리고 ‘침례’ 뿐입니다.
 


3. 성경이 지지하지 않은 기독교 사회화


이제, 기독교 사회화라는 거대한 함정에 빠지게 되는 세 번째 원인에 관하여, 저는 하나님과 세상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성도가 세상의 것을 탐내는 것은 참으로 이율 배반적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요한일서 1장 6절은 "만일 우리가 그분과 교제한다고 말하며 어둠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3장 15절과 16절은 우리에게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화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종교인들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들은 ‘이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만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고, 부흥과 개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C.168-164(구약과 신약 사이 하나님의 침묵기)년,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더럽히고 종교적 자유를 박탈한, 셀레우쿠스 왕국을 상대로 혁명을 일으켜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마카비 혁명'입니다. 그 혁명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되찾게 한 그들만의 소중한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역사에 관한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승리로 종교적·정치적 자유는 되찾았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은 되찾진 못했습니다. 그들의 성적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들의 한계이자 열매입니다. 종교적 신념으로는 결코 부흥이나 개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회화를 추구하는 이념은 공산주의처럼 허왕 된 환상이며, 교회 분열을 조장하는 마귀의 작품입니다. 종교 다음으로 정치 이념만큼 사람을 분열시키기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저들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늘 권력과 이익이라는 두개의 얼굴이 맞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회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거짓된 열심입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진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관심사는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다른 한 가지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4. 성도가 추구해야할 본분
 
이제 마지막으로 (요16:33)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16:33)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세상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란 복음을 위해서 살아 갈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법입니다. 사회를 기독교화시킨다고 해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평안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사도들이 로마 정치인들과 결탁하지 않고 왜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을까요?
 
여러분. 사람의 생각은 어리석고 그 지혜에 모자람이 큽니다. 때문에 한 가지 일만 생각하면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입니다. 잠언 4장 27절은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할지어다.”라고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악에서 떠나려면 우리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지, 인간의 옮고 그름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성도가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무엇을 지지하든 복음보다 강조되어선 안 됩니다. 이것이 제가 강조하고 싶은 논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이미 마귀의 것이기 때문에(고후4:4; 엡2:2; 엡6:12)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시기 전엔 기독교 사회화는 불가능 한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입니다. 
 
복음이 아닌 인간의 철학이나 이념으로 세상과 유착관계를 형성하며 하나님보다 이념을 더 큰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그들로부터 떠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보면 속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따르지 마시고 말씀에 따르십시요!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요일 5:19)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아느니라.


 
5. 결론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권력에 거역하지 말고 복종하라고 합니다(롬13:1-2).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말 그대로 'History' ,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을 우리의 힘으로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바빌론에게 망하게 하고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슬퍼하던 예레미야와 하박국은 기독교사회화 또는 정치교회를 운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할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뿐입니다. 그 하나만 기도로 간절히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권력자들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정치교회를 하려는 것은 불신 입니다. 
 
(롬13:1) 모든 혼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느니라.
(롬13:2)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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