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19세기 교회 개혁을 강조했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실존'이란, “영원의 생명에 참여하지 않은 인생은 살아있는 시체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를 믿고 그분으로부터 소망을 얻어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인간은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건물과 수만에 달하는 성도 수와 거액의 헌금을 자랑하는 교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실존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계시록 2장, 3장은 일곱 교회(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2:7;11;17;29, 3:6;13;22)라고 합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와 '필라델피아 교회'를 제외한, 다섯 교회는 모두 책망을 받았습니다. ② 버가모 교회 : 현실과 타협한 교회. ③ 두아디라 교회 : 음행에 넘어져 부패한 교회. ④ 사데 교회 : 죽은 교회. ⑤ 라오디게아 교회 : 미지근한 교회. "첫사랑을 잃음-> 미지근한 신앙생활-> 현실과 타협-> 양심 부패-> 죽음” 1. 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첫 번째 병은, 첫 사랑을 잃게 하는 방관하는 태도입니다. (에베소) 방관은 첫 사랑을 잃게 합니다. 첫 사랑을 잃으면 교회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어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로 자신의 나태함을 교묘하게 포장합니다. 방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회는 사람의 것이 되고, 사람이 주인이 되면 그 교회는 병들어 오래 가지 못합니다. 2. 두 번째 병은, 탐욕 입니다. (버가모) 탐욕은 곧 우상숭배입니다(골 3:5). 버가모는 탐욕스러운 발람의 교리를 따르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탐욕은 인생의 자랑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부추기는 열쇠입니다. 왜 교회들이 몸집을 키우려 합니까?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자랑하기 위함니까?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탐욕을 경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병은, 음행입니다. (두아디라) 육신의 간음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배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간음만 배교 행위가 아닙니다. 교회를 잘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배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찾지만 그의 발은 돈과 명예를 쫓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주님은 맘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음을 하다가 하루에 삼천명이 죽임 당했습니다. 교회라고 예외 일 수 없습니다. 4. 네 번째 병은, 선택장애 입니다.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했습니다(3:17). 그들의 소망은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토해내신다고 하십니다. 일곱 교회들 가운데 이만한 경고를 받은 교회가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자는 영적인 선택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엘리야는 "이날 너희는 선택하라!"라고 말했습니다(수 24:15; 왕상 18:21). 선택장애는 세상을 사랑할 때 생겨나는 증상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면 토해내십니다. 5.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병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위선자들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라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라는 저주를 8번이나 반복하시며 사실상 사형선고를 확정했습니다. 위선자는 성경보다 인간적인 철학(인본주의)을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랍비(교사)를 자처합니다. 그들은 본성에 염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암적인 존재입니다. 교회가 이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죽게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질병을 치유하고 예방하려면 어떤 처방전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처방전은 회개하고(계2:5,16,22; 3:3,19),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계2:2,9,13,19,3:1,8,15). 예수님은 일곱 교회를 판단하실 때 그들의 행위를 보셨습니다. 회개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면 완전한 행위가 나올 수 없습니다(3:2). 물론 인간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노아(창6:9), 다윗(왕상15:3), 욥(욥1:1;8;2:3)에게 '완전하다'라고 평가 하셨던 것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신32:4, 삼하22:31). 두 번째 처방전은, 책망을 받지 않은 필라델피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격려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주셨고, 서머나 교회에는 더 참고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힘으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교회 규모가 커도 사데 교회처럼 죽었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키작은 소년 때 거인 골리앗을 때려 잡았고, 기드온은 살기 위해서 미디안에게 몸을 숨길정도로 연약했지만 그를 용사가 되게 하셔서 미디안을 물리쳤습니다. 삼손은 눈이 빠지고 혼자 남겨졌을 때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죽이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작고 힘들고 여유가 없더라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교회와 성도들을 틀림없이 축복하십니다. 세 번째 처방전은, 필라델피아/서머나 교회처럼 핍박을 견디는 것입니다. 믿는자에게 핍박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마16:24). 성도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닐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그 핍박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이 세대에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마귀는 위선자들로부터 신실한 자들을 시험하고 죽이고자 합니다. 그 덫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됩니다. 지치지 말고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정직함으로 신실해야 하며, 악인들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 짓는 것과 탐욕스러운 마음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생각이나 미지근한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일곱 교회의 칭찬과 책망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받을 판단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지금 믿음의 어떤 위치에서 영적으로 서있으며, 어떤 영적 질병에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날에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기쁨의 구원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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