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에 대하여..,>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마음 아픈 것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너무 쉽게 형제자매의 관계가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간에도 우정이라는 것이 있을텐데, 조금만 관계가 서원해지면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돌아서고 다신 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형식적인 관계로써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인문학적 관점에서 우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써두었던 글을 공유해봅니다. 형제, 자매를 부를 때마다 우정을 담아 불러보면 좋겠습니다. <우정에 대하여..,>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존재적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도구적 관계)로 설명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참된 만남이다. ‘내’가 존재함으로서 ‘너’가 기쁘고, ‘너’가 있음으로 ‘나’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참된 관계를 사람들은 ‘우리(W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 됨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우리(we)는 히브리어 ‘리쉬마흐’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고 ‘존재하기 위한 나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We)란 '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나들' 또는, '너는 곧 나'라는 뜻으로써 존재적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포근한 단어이다. 그와 반대로, 도구적 관계는 필요에 의해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사무적 관계를 말한다. 우리 사회는 온통 계약관계로 얽혀있다. 그 자체가 모두 나쁘다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살다보면 도구적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을 사람 냄새 나는 우리(We)라는 관계를 통하여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가 ‘친구’다. 친구간에는 실수 앞에서도 웃으며 어깨 한 번 툭! 치는 것으로 관계가 금방 복원된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이미 상호간에 신뢰관계가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고, 필요충분 관계에서 오는 계산적 부담이 최소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구'란 무엇일까? 한자로, 친(親)은 ‘가까이에서 본다’, 구(舊)는 ‘옛날’ 또는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즉, 친구란 ‘가까이에서 오래 두고 본 사람’이다. 그 관계의 사랑을 '우정'이라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에 관하여,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하였으며, 키케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이고 존재의 본질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로 결합된 참된 우정은 무슨 고민이든 숨김 없이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 부모와 형제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것들 조차 유일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관계다. 이때 둘 사이에 필요한 것은 소주와 잔 하나만 있으면 된다. 친구란 그런 것이다. 친구는 어두운 표정 하나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왜 아파하는지, 무엇이 그를 분노케 하는지 살피는 존재다. 때론, 아닌 줄 알면서도 옳고 그름의 판단을 뒤로 한 채 모른척 편 들어 주기도 한다. 친구란 그렇게 공감해주는 존재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적 관계에서 오는 우정과, 도구적 관계에서 오는 우정을 분별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각박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만큼 관계도 서둘러 형성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둘러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정(amicitia)과 사랑(amor)은 모두 ‘ămor(아모르 : 사랑하다)’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개념상 우정없이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모순인 셈이다. 물론, 호감도에 따라서 그 기간이 짧아 질 수 있다는 점에서 관해서 만큼은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겠다. 비단, 그렇더라도 우정은 조심스러운 것이다. 우정의 극단에는 배신이라는 올가미가 큰 입을 벌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정을 분별해야 한다. 특히, 오래된 친구나 연인으로부터 오는 배신은 그 상처가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다. 그 방법으로 키케로는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보라!"고 조언하였다. 거짓 우정은 말과 다르게 손실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며 숨기에 급급하지만, 참된 우정은 손실을 감내하면서도 기꺼히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다. 저급한 발상일지 모르나, 그러한 우정을 등급으로 구분한다면 '의로운 우정'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안위나 이익을 위하여 침묵하거나, 친구를 계단 삼는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정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렇다고 서둘러 실망하진 말자. 비참한 생각에 내버려진 자신을 바라보며 행복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에 지배를 받고 살며, 우정은 희생을 강요하지 않기에 용서라는 공간을 남겨둬야 한다. 친구라면, 최소한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진정한 사과와 함께 신뢰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친구를 받아 주는 것 또한 우정이다. 우리는 그런 우정을 편의상 '사무적인 우정'이라 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배신 이후에도 뻔뻔하게 자신의 과오와 이익을 위해서 살인마가 증거를 인멸 하듯, 혼신의 힘을 다해 친구를 또 다시 곤경에 빠뜨리고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신만큼 사람의 영혼을 깨뜨리는 큰 충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일시 되었던 영혼의 관계가 깨지면 그것은 평생에 걸쳐 각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정 자체를 불신하지 말아야 한다. 우정은 항상 어디서나 환영받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안에 환영받는 우정관계를 통하여 이미 깨진 우정을 반면 거울삼아 더욱 건실한 우정의 탑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성숙함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정은 '시기와 질투'라는 대책없는 독극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시기와 질투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같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 시기와 질투는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핍이 발견될 때 느껴지는 분노다. 비교당한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열등감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 결코, 만만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우정을 깨뜨리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늘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손해보면서까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 (요 15:13) 『아무에게도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 "우정이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본성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은 인간의 우정을 더욱 가치있고 진실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에서 우정보다 더 가치 있고 행복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 키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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