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
강단에 선 교수가 기독교가 미신임을 알게하려고 학생들에게 "만일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악도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은 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며 교수에게 질문합니다.
"교수님 '추위'는 존재합니까?"
교수는 그 학생을 엉뚱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당연히 존재하지!"
그러자 학생은 반박합니다.
"틀렸습니다. 물리학 법칙에서 절대 0도는 '열의 완전한 부재'이기 때문에 사실 '추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수님!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어둠'은 존재합니까?"
"당연히 존재하지."
"틀렸습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므로 물리학에서 빛은 연구할 수 있지만 어둠은 연구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추위'는 열의 부재를, '어둠'은 빛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용어일 뿐입니다. 따라서 악은 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 신이 악을 창조했다거나 그를 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학생의 이름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빛이기 때문에 그분 안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으며(요일 1:7), 어둠과 공존할 수도 없습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우리의 허망한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반드시 죄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젊은 시절에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외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명령을 버림으로써 그는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되었습니다.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삼은 것을 심히 안타까워하셨습니다(삼상 15:11, 35). 물론 사울 외에도 자기 죄로 인해 버림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하나님은 사울의 몰락을 슬퍼하셨을까요?
첫째, 사울의 왕좌는 단순한 왕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왕좌는 이스라엘 위에 서게 될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하는 자리였습니다(삼상 13:13). 그러나 사울은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였고, 끝까지 다윗을 대적하는 등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울은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자였고 동시에 대언자였습니다.
구약시대에서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을 때만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서는 성도들의 몸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고전 3:16).
실패한 사울의 모습은 곧 실패한 우리 신약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 채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지 모릅니다(엡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엡 4:30)
여러분,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자(삼상 15:23) 하나님의 영은 즉시 그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그에게 악한 영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시기와 질투, 분노와 폭력으로 다윗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블레셋의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꿈이나 우림이나, 대언자로도 응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삼상 28:6).
하나님의 부재는 사울을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쫓아냈던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갔고, 그녀에게 사무엘을 불러내 달라는 비이성적인 부탁을 하였습니다. 미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고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엔돌의 무당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낙원에서 끌어올리셨고, 사무엘의 입을 통해 내일 아들들과 함께 너는 죽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엔돌의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을 통해 사무엘이 땅속에서 올라오는 장면
하나님의 부재는 영과 혼의 평안함을 무력화시킵니다. 양심을 무디게 하며, 어떤 기도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합니다. 모든 불의가 죄지만 특별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는데(요일 5:17), 그것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그분을 기만하는 영적인 간음입니다.
그런 죄는 기도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요일 5:16). 오직 그 대가는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삼상 28:19). 구원받은 자가 버림받는 것은 하나님께 크나큰 슬픔이 됩니다.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사울과 대비되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란 죄가 없음이 아니라, 크고 중한 죄에 걸려 넘어졌을 지라도 하나님의 부재가 두려운 나머지 즉각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하는 일이 없도록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롬 12:2, 킹흠정)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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