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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대한 불확실성과 오해... 그리고 <지옥>과 <지옥 : 두 개의 삶>

새우물침례교회 2023. 8. 24. 22:16

문제작 아닌 '문제 작품' 넷플릭스 <지옥>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넷플릭스의 총 6편짜리 시리즈인 <지옥>(2021)은 초자연적 존재의 무차별 살인인지 행위에 대한 천벌인지 알 수 없는 현상을 새진리회라는 신흥종교집단이 이용하는 내용으로 무수한 기독교 교리의 오류와 오해가 뒤엉켜 있다. 말이 신흥종교지 사실상 모두 기독교적 개념인데, 이미 많은 리뷰와 교계의 비판이 나와 있기도 하다.

이야기를 뒤틀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익숙한 주제의 왜곡이기 때문에 마지막 6편 외에는 큰 재미가 없었다. 어느 날 이유를 모른 채 천사로부터 지옥행을 고지 받는 사람들... 급기야 신생아까지 이런 고지를 받음으로써 원죄의 교리까지 등장하는데, 기존 교리의 부실함이 낳은 혼란이 더해져 제대로 설명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시리즈와 <부산행> 등을 만든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 <사이비>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수몰지구에 사이비 교회를 만든 사기꾼이 목회자를 데려다 불안한 사람들을 속이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꾼이 아니고, 나름의 고민과 진지함이 상황의 소용돌이에서 뒤틀리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감독이 기독교를 잘 아는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역시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옥>에서 기독인답지 않게 기독교와 먼 개념들을 말하고 있다. 깊이 아는 사람이 왜곡하면 더 문제작, 아니 문제 많은 작품이 된다.

어떤 평론가가, "연상호 감독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한 것은 뻥인 것 같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꼭 기독교 교리를 비판적으로 묘사해서가 아니다. 뒤틀고 꼬는 과정에 앞뒤가 없어서다. 차라리 제대로 된 비판이나 풍자를 하면 반박도 조목조목 가능한데, 기독교와 사이비의 중간쯤 어딘가에서 이상한 설정을 하니 반박하려면 설정부터 해석까지 모든 과정의 설명이 필요하다.

도덕성의 강조를 말하는 것인지, 종교의 무용성을 말하는 것인지, 인간 본성에 새겨진 악함을 말하는 것인지도 초점이 없다. 세계 시청률 1위에 올랐고, 진지한 주제에 세계가 놀랐다지만 오래 화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의 본성을 자극할 수 있지만 진짜 숙제를 던지는 데는 미흡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풍자를 통해 기독교의 모호한 주장과 기독인들의 비도덕성을 비꼰 것이나 사건과 인물 등의 구조를 통해 기독교적 삶과 죽음, 죄, 심판, 군중의 심리 등을 표현한 점은 인상적이다.

이야기의 동기로 작용하는 왜곡된 복음과 교리는 교회의 책임이다. 제대로 된 것을 거의 배우지 못하고 특정 교단의 논리나 명쾌하지 않은 두루뭉술함에 젖어 수십 년 살다 보면,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누구인지 알기가 어렵다. 이 드라마는 오랫동안 닦지 않은 안경으로 기독교와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천국행을 고지 받아도 고통스럽다?

사실 이 시리즈는 연상호 감독이 오래전에 만든 애니메이션 <지옥 : 두 개의 삶>(2002)이 모티프가 된다. 원작 웹툰의 스토리를 쓴 것도 연 감독이다. 애니메이션 <지옥 : 두 개의 삶>은 '지옥'과 '천국'이라는 두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먼저 '지옥' 편은 넷플릭스의 <지옥>과 비슷하다. 어느 날 천사의 예언 고지를 받는 사람은 자기가 죽을 시간을 알게 되고, 예정된 시간이면 지옥 사자들로부터 극심한 고문을 당한 뒤에 죽는다. 넷플릭스 <지옥>과 조금 다른 것은 도주가 가능해서 주인공 남성은 끝없는 공포 속에 시궁창을 헤매며 도망치는데, 그 고통이 지옥이나 다름없다.

'천국' 편도 마찬가지로 고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시간에 천국에 갈 것을 통보받는 것이다.

각각 지옥행과 천국행을 고지 받은 사람들

참 희한한 것은, 지옥은 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긴 설명이 필요 없는데, 천국은 가서 뭘 하는지 설명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천국' 편의 여주인공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누가 돌보지? 내 인생에 남은 일들이 많은데 이걸 다 어떻게 두고 가지?' 하면서 떠나야 할 날이 가까워질수록 공포에 휩싸인다. 이 땅을 떠나야 하는 그녀의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결국은 그녀 역시 도주를 선택하고 도망친다.

천국이 어떤 곳이기에 그녀는 도망을 쳤을까? 지옥과 천국에 가게 된 두 사람 모두 도망을 간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지만, 지옥과 천국에 대한 전제나 제시가 없이 둘의 행동을 동일하게 귀결시키는 묘사는 패착이다. 넷플릭스의 <지옥>도 같은 문제를 지닌다. 불에 의한 고통이라는 면에서는 맞지만 어떤 사람들이 왜 가는지를 단지 인간 기준의 '선악'으로만, 그리고 알고 보면 '무작위'일 수 있다는 더 이상한 숙제를 던지기 때문이다.

감독은 <지옥 : 두 개의 삶>을 통해 천국과 지옥이 모두 인간에게는 '지옥' 같은 불행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천국조차 미지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두려움에 육신의 죽음이 공포로 더해진다. 일차원적인 감각으로 고차원의 주제를 다룬 셈인데, 주제가 무겁다고 다 진중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천국... 그리 반갑지 않은 곳?

그런데 크리스천들도 천국을 잘 모르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기쁘고 즐거운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즐거울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 땅에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다 두고 가는 일에 아쉬움이 없을까, 걱정도 팔자인 사람도 많아 보인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선뜻 가고 싶지는 않은 곳이 천국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모두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불안과 의심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최근에 나는 수도권의 몇몇 지역 교회를 돌며 <요한계시록 바로 알기> 개정증보판 세미나를 하고 있다. 두어 시간에 설명하기는 방대한 내용이지만 앞으로 있을 전체 일의 순서와 포인트 위주로 짚어보는 시간이다.

계시록의 거의 끝으로 가면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이곳은 우리 성도가 영원히 살 곳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시'이다. 이 대목에 가면 꼭 강조하는 것이 있다.

"여러분, 천국에 가면 하루 종일 찬송가만 부르고 아침 먹고 예배, 점심 먹고 예배, 저녁 먹고 예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낼까요? 그럼 거기가 지옥(?) 아닐까요?"

점심 후 졸린 시간에 강의를 듣던 분들이 피식 웃는다. 물론 농담이고, 현재의 육신적 기준을 빗댄 역설적 이야기다. 천국에 가면 기쁨 아닌 것이 없다. 지루한 예배만 매일 이어지는 그런 삶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 성경을 깨달아 갈 때, 예배와 성경공부처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었는가.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었고, 교회가 너무 좋아서 교회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몇 년 전 코미디언 뺨치는 장 모 목사가 내가 다니는 교회에 부흥집회를 왔을 때, 무슨 얘기 끝에 당시의 담임목사를 향해 이런 농담을 했다.

"솔직한 얘기로 천국 가면 베드로 형님이 우리 설교 시키겄어?"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야 원체 웃기니까 혹시 한두 번 세워줄지 몰라. 목사님은 어림두 없어! 각오 혀."

이 말에는 천국에서 하는 일들에 대한 오해가 일부 들어 있다. 천국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곳인 것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매일 부흥집회를 하고, 예배만 드리고, 혹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흰옷을 입고 구름 위에 올라앉아 하프를 연주하면서 무한정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게 넓은 하얀 복도에 아무도 없고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미 그 이전에 올 천년왕국도 주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는 것처럼 충만한 때다. 하물며 새 예루살렘에서 성경공부나 지금 같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좀 모순이다. 이 땅에서 숨만 쉬어도 죄인 것처럼 그 나라에서는 존재 자체가 예배일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일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천국' 하면 정확히 어떤 시기에 맞이할 어떤 세상이라기보다 죽어서 가는 안락한 유토피아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실제적 기쁨

신랑 예수님이 마련하신 처소에서 신랑과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지금 상상할 수 없다. 수십 년 헤어진 자식이 부모님을 찾았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일지... 아프리카 노예가 짐승처럼 유린당하며 살다가 해방되는 기쁨과 같은 것일지...

아무튼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가기 싫어 막연하게 불안해하는 그런 태아의 마음 같은 것이 천국을 앞둔 인간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오면 부모를 만나 엄마 배 속에서 상상도 못하던 것들을 누린다. 그 간극보다도 인간이 천국을 상상만 하다가 경험하는 그 간극이 더 클 것이다.

무엇을 해도 즐겁고 가만히 있어도 기쁜 상태. 게다가 그 기쁨을 빼앗아 갈 존재가 없는 상태가 천국이다. 우리는 그래도 이해를 못 한다.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을 토대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유치한 부분이라도 우리는 더 큰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들이듯이 사람은 죽어서도 정체성을 그대로 지닌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과 연속선상에 있을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느낀 건전한 즐거움은 완전히 승화되고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예를 들어 레고 블록 만들기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손을 안 대고도 레고보다 정교한 블록으로 대도시를 건설해 볼 수도 있는 정도랄까... 자동차 매니아는 직접 엄청난 차를 만들어 행성들을 오가게 된다든지... 아무튼 굉장히 현실적인 즐거움도 많을 것 같다.

음질 나쁜 한 개짜리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최고급 오디오에 서라운드 스테레오로 즐겨 듣던 가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차원일 것이다.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음식을 먹을 텐데, 그 맛은 비교 불가 수준일 것이다. 아무튼 말로나 상상으로 불가능한, 좋은 의미의 쾌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땅에 두고 온 가족을 기다리는 일도 눈 깜빡할 정도로 짧은 시간일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은 남되 아픈 기억은 해결될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에 간 부자는 요구도 많고 말도 많지만 낙원이 간 나사로는 아무 말도 없다. 걸인이었던 나사로의 침묵은 아픈 기억에 대한 해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지금 천국을 시뮬레이션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현세적 걱정들로 천국에 가게 된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해 도망을 친다는 가정은 사람의 속성이 한없이 가볍고 나약함을 드러내는 설정일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 전제 없이 천국과 지옥을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하고 무책임하다. 물론 세상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고, 구체적인 천국의 소망이 없는 신자들에게도 숙제를 던져주는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영원한 한 도시의 소망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한 새 예루살렘. 이 도시는 믿음의 선조들과 그들처럼 살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다(히 11:13~16). 이 땅에 미련을 두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지 않고 나그네요 순례자로 여기는 이들에게 허락하신 도시이다.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계 21:2)

그 도시는 네모반듯하게 놓여 있으며 길이가 너비만큼 길더라. 그가 그 갈대로 도시를 측량하니 만 이천 스타디온이더라. 그것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으니라. (계 21:16)

이곳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처소'로 아버지 집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이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시를 보고 신랑 예수님이 신부인 성도를 위해 예비하신 그 도시임을 알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대략적 크기. 한 면의 가로 세로가 2240km라서 피라미드 형태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막이라는(계 21:3) 표현처럼 사각형일 수도 있다.

이곳은 정육면체 혹은 피라미드 형태로 보이는데, 한 면의 가로 세로가 각각 12,000스타디온, 약 2,240km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5배 정도 되는 사각형의 터에 정육면체라면 위로 1km마다 한 층씩 나눠도 2,240층이 되는 엄청난 공간이며, 이렇게 할 경우 바다를 포함한 지구 총면적의 24배나 된다. 모든 시대에 산 사람들을 약 400억으로 보는데, 그중 10%가 구원받았다고 해도 다 들어가기에 차고 넘친다. 단층만으로도 가로 세로 100 X 100m짜리 터가 5억 개 넘게 나오는 공간이다.

집이 있다고 외출을 못하는 게 아니듯이 이 공간만이 우리의 터전은 아니고, 온 우주가 아버지의 것이면서 우리의 공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때도 땅에는 계속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인데, 성도는 그들의 통치자이므로 새 예루살렘 안에서만 사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공간과 장애물에 제한이 있는 3차원의 몸이지만 그때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 지금의 아파트 평수 같은 그런 개념은 아닐 테니까.

천국에 대한 불확실성은 모호함에서 오고, 모호함은 12,000스타디온 등의 수치를 상징으로 풀거나 아예 가르치지 않는 교회들 책임이다. 그런 성도들의 답답함을 이단들이 파고드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많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고, 내 삶의 고비를 넘게 해주시며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게 된다. 그곳에서는 사람을 속박하던 시간의 개념이 없으므로 '끝'이나 '지속'의 부담과 지루함, 싫증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죄의 개념도 없어서 세상에서처럼 한 시간이라도 죄를 안 짓고 살 순 없을까 하는 고민도 없다. 아무리 애써도 죄를 짓게 되고, 아무리 즐거워도 시들해지며, 한없이 기쁘다가도 또다시 절망이 찾아오는 이 지긋지긋한 삶이 끝나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계 21:4)

이 땅에서도 무엇을 해도 좋고,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을 때가 있다. 벼르고 벼르던 휴가에 남태평양의 휴양지 바닷가 야자수에 해먹을 드리우고 누워 있는 심정, 한참 옹알이를 하는 예쁜 자기 자식을 안고 바라볼 때의 사랑스러움과 만족감 같은 절정의 순간이 지속되는데 지루함도 느끼지 못하는 기쁨 같은 것이 겨우 한 조각 정도 상상해 볼 수 있는 느낌 아닐까 싶다.

천국에 관한 상상도나 영화의 묘사는 공허하고 애매하다. 지옥만큼의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천국이 따분하고 하품 나오는 그런 곳은 아니다. 이 도시는 땅에 미련을 두지 않고 본향을 그리던 믿음의 선조들을 위해 예비하신 곳이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하나님은 약속대로 마지막에 이 처소를 성도에게 주실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계 21:3)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기뻐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날에 참된 기쁨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죽음은 모든 이에게 두려운 일이다.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앙의 영웅들도 죽을 때는 주를 향해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이 땅을 떠난다.

그처럼 우리는 보지 못한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이지만 그 어떤 실제와 현상보다 더 확실한 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했던 베드로처럼 소망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이 땅의 고통 너머에 있는 한 도시를 바라보자. 땅에 매인 자들의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결코 그려낼 수 없는 참 기쁨과 영광의 도시를!

출처 : 김재욱 작가 / 바이블로그 https://blog.naver.com/woogy68/222608689390

 

천국에 대한 불확실성과 오해... 그리고 <지옥>과 <지옥 : 두 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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