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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새우물침례교회 2023. 8. 22. 23:46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집요하다. 그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아주 예리하게 파헤치고 분석한다.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할 정도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해낸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선언한다. “실제 차이가 없는데 굳이 구분한다고 느끼는 사람, 너무 사소한 것까지 구분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새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받은 자는 그 차이를 압니다.” 수술하는 의사는 잘라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를 아주 예리하게 구분한다. 
사단은 모방의 천재이다. 사단은 거의 모든 좋은 것을 모방하여 기독교를 종교로 전락시킨다. 교회 안에 종교가 침투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어느 시대에나 종교는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가장 큰 원수였다.
사도 바울도 한 때 기독교 신앙을 격렬히 반대했다. 교회를 박해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 모독자로 취급하며 교회를 없애고자 전력을 다하였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는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고수하면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양심을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였다(행 23:1).
그런데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던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고 거듭난 후 이전에 유익하던 것, 자랑하던 것,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쓸데없는 배설물로 여겼다. 새 생명을 받고 나니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한 가지였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빌 3:8). 호세아 대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호 6:6). 사도 바울은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참된 기독교의 복음 즉,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종교와 기독교는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분별을 잘 하여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어떤 형식이 드리느냐 하는 것보다 휠씬 중요한 것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도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들이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시며 자신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건물도 없고 예배 의식도 없는 광양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듯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실제로 계심을 알았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인 간심이 있어서 주님을 찾아왔다. 그는 성경에 대해 알고 싶어 하였다. 어떤 사람은 신학 서적, 경건 서적 읽기를 매우 좋아한다. 어떤 교인은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나 제자훈련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한다. 니고데모처럼 큰 열심히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다면 종교인일 뿐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한다. “내 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오니”(시 63:1)
어떤 종교인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논증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과는 미묘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 바로 그분, 그분 자신을 알고 싶어 한다.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단순히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열망이 인생의 주된 목표가 된다.
어떤 종교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은혜나 체험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사모한다. 복 받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은혜나 체험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경험하면 자연스럽게 은혜도 받고 복도 체험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일순간의 체험보다 휠씬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하였다(창 5:24). 이 말은 에녹이 단순히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시편 기자는 고백하였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그의 고백은 단순한 신학적 교리적 고백이 아니다. 그의 고백은 단 한 번의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하는 고백이 아니다. 그의 고백은 삶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교제를 통하여 나오는 고백이다.
요즘 한국 기독교가 부패하고 타락한 것 때문에 교회 개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est reformanda!)"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을 외친 것은 문제 많은 종교를 문제가 없는 종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기독교로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개혁을 단지 종교의 문제점과 허물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고치려는 것으로 한정하면 않된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영적 부흥이 있기를 소망하였다.
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진정한 개혁은 교회의 외적인 면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면을 각성하려는 것이다. 육신의 눈을 밝히 떠서 교회가 얼마나 투명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운영하느냐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정말 교회가 개혁되려면 영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각성하고 교인들이 각성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바로 깨어 있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 교회를 단지 깨끗한 사회단체로 만들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단체이며 따라서 영적으로 바로 서야 한다.
 
글쓴이 : 배경락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