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참된 예배”, (요 4장 20-26) 코로나 팬데믹으로 200여 개가 넘는 중대형 교회가 경매로 쏟아져 나오고, 교계 성도 수는 200만 이상이 줄어들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현장예배를 온라인으로 대체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헌금 안 해서 좋고, 오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서 좋고, 심지어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으니 편해서 좋다고들 말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사람을 위한 것인지 예배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예배자를 중심으로 한 ‘구도자 예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예배는 이미 망가졌지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은 사람들 취향에 맞는 노래로 대체되었고, 강단은 도덕과 윤리, 기복주의 설교 등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 온라인 예배에 길들여진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로 나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를 거부합니다. 그러기엔 너무 편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기독교의 현 실상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단지 그동안 감춰져 있던 실상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근 ‘온라인 교회’도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한 내용을 보니 교인을 성도라 부르기도 하고, 시청자라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가 무엇이고, 성도가 어떤 존재이며, 예배는 누구에게, 왜 드려야 하는지도 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를 온라인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이 목회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를 담임하셨던 어느 목사님은, “만일 내가 젊은 나이로 돌아가 목회를 한다면, 촬영할 수 있는 강단만 가져다 놓고 교회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교제나 목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게 되는데요 글쎄요, 그것은 앞으로 연구를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대안이 없는 주장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일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눈에도 과연 그렇게 보일까요?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미션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 1:8)은 성도들에게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합니다. 증인은 법정에 출석해야 증인자격으로 인정받습니다. 예배 가운데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몇 개월 전에는 나름 인지도 있는 어떤 목사님은 오늘 본문 (요4장)의 내용을 가지고 온라인 예배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분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4장 20절에,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21절) 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꼭 교회를 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면,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성경의 이치에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더구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과연, 그런 의미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셨을까요? 정말 그런지, (20절)부터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배척과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사마라아인에게 마귀 들린 자라고 할 정도로 모멸했습니다(요 8:48).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관계는 종교적으로 경쟁 상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고집한 것은 (22절)에,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가성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조상’은 유대인들의 조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산’은 ‘그리심 산’이며, (창12:6, 33:18-20, 수8:30-33)에 가서 보면, 아브라함, 야곱, 여호수아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누구를 대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중요치 않았습니다. 이곳도 우리 조상들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은지 묻는 그녀의 질문에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절). 예수님은 ‘내 말을 들으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말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화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까요? (히11:4)을 보겠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느니라. 아벨의 예배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느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예배자로 하나님께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교회는 믿음만 있으면 예배는 어떻게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계속해서 (히 11:6)도 읽어보겠습니다. (히 11: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문맥상 예배는 동사입니다. 명사가 아닙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희생물을 들고 가서 그분을 찾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요? (롬 12:1)에 그 답이 있습니다. (롬 12:1)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신약에서 하나님은 죽은 희생물을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살아있는 우리의 몸을 그분께서는 기뻐 받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3:16).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구약에서의 제사는 하나님께 들고 갈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신약시대에서는 우리의 몸이 그분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몸을 기뻐 받으십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보존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꼭, 교회 출석을 해야 할까요? 이 부분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이 중요 합니다.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전 1:2)에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장소가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장소가 없으면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예배에 있어서 장소도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집에서 혼자 모니터 보고 예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나 예배의 개념이 아닙니다. 모여야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모임은 예배와 교제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배란 무엇입니까?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이 연합하여 영으로 그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교회로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처사입니다. 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단 한 번도 모이지 말라고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이기에 힘쓰라고”명령합니다. 어떻게 힘쓰라고 합니까? (행 2:46)로 가봅시다. (행 2:46) “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교회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교제하라고 명령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히 10:25)은 어떤 사람이 습관적으로 모임을 폐하는 것을 보거든 서로 권면하라는 지침을 줍니다. (히 10: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물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은 모이기에 힘쓰는 것이 그닥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본 방침은 모이는데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넷 교회’는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본질에서 이탈된 시도이며, 모임을 폐하는 것을 정당화 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사람들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1절)을 보겠습니다. (21절)“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 이 말씀은 앞으로 유대인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관한 예언입니다(디아스포라). 그런데 예수님은 (23절)에 ‘지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시제가 다소 헷갈릴 수도 있지만 (요 14:6)을 보면 명료해집니다. (23절)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요 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신약 성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예배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21절)에 그들이 참된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때부터 오늘날에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21절) 한 구절만 뚝 떼 와서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끼워 맞추려는 것은 교회를 해치는 아주 위험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장소에 집착하고 있던 수가성 여인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해석을 하고, 또 인터넷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을까요? (22절)을 보겠습니다. (요 4: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 없는 예배는 아버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창조한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이신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역대상 21장 14-27절을 보시면, 백성들과 다윗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하루에 칠만 명을 죽이는 전염병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배를 드렸을 때 전염병은 멈췄습니다. 생사(生死)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성도와 교회는 물론이고 나라를 치유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야말로 근본적인 치유책입니다. 하나님 없는 백신과 치료제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한국 교회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물론, 사안의 경중에 따라 정부의 방침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정죄하거나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이지 않거나 또는, 모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게으름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혼에 파편처럼 박혀 있기 때문에 모이지 않으면 결국 나태함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몸은 그분을 모시는 성전이기에(고전 6:19) 그분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여서 교회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예배를 보러 간다’고 말합니다. 우리 몸을 살아있는 희생헌물로 드리지 않고 보러다니다가 인터넷 교회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200만이 넘는 성도를 잊고 말았습니다. (23절)은 지금이 그 예배를 드릴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수가성 여인은 메시아를 찾았고(25절),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그분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찾길 원한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찾을 것입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