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남한산성
그리스도인의 남한산성
주화파 vs. 척화파
2017년에 흥행했던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1632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삼고있다. 당시 기동력이 좋은 청나라는 단 5일 만에 수도인 한성(지금의 서울)까지 진격해왔고, 가장 먼저 강화도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였다.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막힌 인조는 지금의 송파와 성남 사이에 소재한 <남한산성>으로 피신 하였고 그곳에서 청나라와 47일간의 항전이 시작된다.
한정된 식량으로 남한산성에 고립된 채 청과 맞서야 하는 인조와 신하들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척화파를 대표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은 '아직 명나라가 있고 오랑캐와 군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라의 치욕 거리이므로 끝까지 청과 맞서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에 반대하는 주화파의 대표 인물 이조판서 최명길은 '명나라와의 관계보다 먼저, 임금과 백성이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며 청에 굴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감독은 ‘최명길(이병헌) vs 김상원(김윤석)’의 팽팽한 설전 구도에 무게를 실어, 관객들로 하여금 인조의 시각에서 갈등의 해결책을 고민하도록 유도하였다.
청에 무릎을 꿇으면 백성은 살 수 있다. 하지만 조정은 세자를 빼앗기고 청의 신하임을 천명하게 됨과 동시에 나라의 위상은 벼랑 끝으로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무릎을 꿇지 않으면 잠시나마 왕과 나라의 위상은 유지되겠지만 수많은 백성이 사지에 내몰리게 된다. 이제 식량은 고갈되고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간다.
시간이 없다. 선택을 해야 한다. 비굴하게라도 살아남아 차차 대의와 명분을 도모할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대의와 명분을 위해 싸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갈등을 겪고 있는 인조의 답답함과 다급함이 영화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영화 이전에 삶의 문제
오랜 세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이런 진퇴양난의 갈등은 수없이 많았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주기철 목사는 못 위로 걸어가야 했고, 최권능, 김기풍, 박봉진 목사 등 믿음의 사람들은 모진 고문 끝에 순교를 당해야 했다.
그들은 믿음을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겼다. 세상에 무릎을 꿇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세상이 우리를 죽일 수는 있어도 협박할 수는 없다.'라는 비장함을 지녔다. 하지만 이 같은 고난과 각오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고등부 시절 담임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 가운데 하셨던 간증이 생각난다. 군 시절 어느 날 주일에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고참들이 가지 못하게 방해 했단다. 하지만 목사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고참들은 목사님에게 교회 가려거든 곡갱이 자루 몽둥이 스무 대를 맞으라 하였다.
당시, 목사님은 한 번 물러서면 앞으로도 계속 물러서야 할 테니 매를 맞기로 하였다. 결국 목사님은 곡갱이 자루 스무 대를 다 맞고 기절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정신을 차린 뒤 그 길로 곧장 피 터진 허벅지를 부여잡고 교회로 향했다고 한다. 그 뒤로 고참들은 목사님을 볼 때마다 '지독한 놈'이라며 교회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했다.
필자도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강원도 화천에 있는 신병 교육대에 입소하였다. 입소하고 첫 주일이 다가올 때에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났다. 하지만 군대가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으니 그때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신병 교육대 입소 첫 주엔 종교활동이 신병들에겐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예배 한 주 빠진다고 해서 스스로 정죄할 필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목사님의 간증을 복기할수록 양심은 더욱 민감 해져갔다. 그래서 주일 오전에 용기를 내서 조교에게 말을 건넸다. “조교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교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요청했다. 아니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조교는 조교들만 생활하는 내무반으로 나를 데려갔다. 문을 열자, 독사 같은 조교들이 엎드려 TV를 보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험상궂은 조교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야?"라며 쏘아 붙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나를 데려온 조교가, "네가 직접 말해!"라며 재촉하였다. 칼을 뽑았으니 호박이라도 베야 겠다는 생각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가도록 허락 해주십시오!"라고 군기를 가장하여 큰 소리로 내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큰 위협이 찾아올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자마자 조교들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지금까지 들어 본적이 없는 걸쭉한 욕설들과 함께 군화, 슬리퍼, 베개 등 손에 잡히는 온갖 물건들을 나를 향해 그냥 집어던졌다. 그리고 잠시 후, 조교 중에 최고참 병장이 “너 이 자식 이래도 (교회에) 갈 거야? 신병 주제에 미쳤나? 말해 봐! 이 XX야!”라며 고함을 쳤다.
물론 곡갱이 자루로 맞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막 입소한 신병이 조교들 열 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마치 저승사자(단지 비유임) 한 부대와 맞서는 것처럼 살 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저는 꼭 가야 합니다.” 라고 천장을 보며 대답을 했다(눈을 쳐다보면 죽일 것 같았음).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가장 높은 고참 조교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야, 저 꼴통 XX 빨리 데려다주고 와!”라고 했다.
그날 나는 수백 명의 동기들 중에서 유일하게 예배를 드리러 간 신병이 되었다. 사실 예배 내내 조교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의외로 조교들은 매주 주일이 돌아오면 동기들을 데리고 교회에 다녀오도록 인솔을 맡겼고, 나중엔 나를 조교로 차출했다. 게다가 상병 때 대대 군종병으로 추천이 되어 군 목사님과 함께 부대에 교회를 세우고 전역을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참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마귀는 한 번만 이기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 기싸움에서 밀려선 안 된다. 한 번 무릎 꿇기가 어려운 법이지 꿇고 나면 그 이후엔 창피한 것도 모를 만큼 습관적으로 타협을 하게 되어 있고 결국 가진 것 모두 다 빼앗기고 만다. 이것이 영적 원리다.
어느때 굽히고, 무엇을 위해 맞설까
왕은 백성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수백 번이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마귀는 세상을 다 줄 테니 믿음만 내려놓으라 한다(마 4:8-9).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믿음만 지키면 된다고 한다. 왜냐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 15:19; 17:16; 요일 3:13).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하였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우리는 불신자에겐 주화파(주님과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마귀 앞에서만큼은 척화파(세상을 배척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중세 때처럼 종교재판으로 순교를 요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기껏해야 이단이라고 정죄 받거나 물질적으로 불편해질 뿐이다. 그것 피하려다가 영혼의 자유를 강탈 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탐대실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해 도망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으로 들어가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린 것 같도다. (암 5:19)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거인들을 보고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다. 거인보다 하나님이 더 컸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행함 없이 말로만 하는 신앙은 허세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아닌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해 내야 한다(빌 2:12).
그러므로 "믿음은 '입'이 아닌 '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충고는 명제다. 말만 하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적당히 자신의 안위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 놓고 뒷걸음질친다. 그 길을 택한 정탐꾼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목숨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려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길은 '사는 길'이었다.
믿음의 원리는 살려고 하면 죽게 되고, 죽으려 하면 살게 된다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원리가 삶 가운데 부여된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가는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적 <남한산성>을 대면할 때가 반드시 한 번쯤은 찾아온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주화파'와 '척화파' 두 가지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중에 무엇을 택하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성경은 단 한 가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한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적 이익이 없는 길이다. 망해 보이는 길이다. 아름다움이 없는 길이다. 세상과 타협이 안 되는 길이다. 앞날을 기약할 수도 없는 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직 그 길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그 길은 은혜를 자랑거리로 삼으려 하는 자들이나 비겁한 자들에겐 보이지 않는 길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지니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마 16: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