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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과 구약의 경계선
새우물침례교회
2023. 8. 20. 23:06
신약과 구약의 경계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이 어딘지에 대해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이 문제는 물어볼 것도 없이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약전서에 포함된 것은 구약 시대이고, 신약전서에 포함된 것은 신약 시대라고 간단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얼핏 혼동하기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숨을 거둔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죄를 제거하시는 일이 다 성취되고,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뉘며 새로운 상속언약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나누고 구분하지 못하거나 변천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이 기준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일단 구약을 다 읽은 크리스천들은 '신약성경전서'를 열면서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신약 시대로구나.' 아니나 다를까, 마태복음 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처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 말씀은 개역개정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바뀌었지만 '세계'라는 단어에 아직도 매우 익숙하고, '계보'라는 말도 매우 부실하고 단순한 번역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그러니까 바른 번역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generation)에 대한 책이라." 하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번역하면, 마치 새로운 세계, 즉 '신약'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더욱이 메시아인 예수님이 탄생하여 새로운 약속을 주실 테니 이제 신약 시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대'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대에 관한'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풀 때 훨씬 이해가 빠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세대는 한 세대 뿐이므로 모두 같은 형제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즉 메시아의 출현은 또 하나의 큰 기점이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것이 신약의 시점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전(BC)과 주후(AD)를 나누는 경계는 될 수 있지만 구약과 신약의 경계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또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며 그런 오해의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마치 율법을 타파하는 듯한 파격적인 일들을 행하시고, 구약에 없던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것처럼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신약의 다른 점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이 율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율법의 주인이시며 율법보다 위대하신 분이셨기 때문이었고, 법보다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신약전서가 '신약'에 관한 앞뒤 과정을 드러낸 성경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신약의 시점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침례자 요한의 등장이나 주님의 탄생부터 십자가 사건까지가 (긴 역사 중에) 뭐 그리 긴 기간이라고 시점을 정확히 따지려 하느냐고요?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많은 오해가 이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 중에 영화 조감독 출신인 친구가 있는데, 90년대에 시나리오를 인정받아 영화 제작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동창이 있었는데 그의 할머니는 재산가였고, 그 동창은 유언장에 등재된 1순위 상속자였습니다. 그는 할머니의 재산만 상속받으면 친구의 영화에 투자하고 지원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 친구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를 바랄 수도 없었는데, 세월만 보내다 결국 기회를 잡지 못했고, 시나리오는 영화진흥공사 공모에서 2등까지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시대상과 맞지 않게 되어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영화화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1등작은 <코르셋>이라는 작품으로 영화화된 바 있습니다.
아무튼 할머니가 아무리 알부자라도 살아계시면 그 많은 돈도 상속받을 손자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죽은 순간부터 그 유언장은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지요. 신약은 '새로운 상속언약'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상속언약도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모든 법에는 발효되는 시점이 있지 않습니까. 휘발유가 내일부터 인하되는데 오늘밤 11시 50분에 가서 깎아달라 사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 이전은 구약 시대입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왕과 제사장이 되는 시대입니다(계1:6).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나뉜 것이지요. 원래는 그곳 지성소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으시기 잠깐 전에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군가가 지성소로 들어갔다면 어찌 됐을까요. 그는 분명 죽었을 것입니다. 아직은 구약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휘장이 나뉜 뒤로 구원받은 자라면 누구나 자기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 되고, 자기를 영적 희생물로 드리는 제사장이 됩니다(이제 지성소는 없고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왕좌에 직접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히10:19~20)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벧전2:5) 물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약속을 주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사전 작업들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효력 문제에 있어서 이것을 잘 구분하는 일은 중요한 것입니다. 순수한 물에는 '끓는점(비등점)'이라는 것이 있어서 100도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무리 뜨거워도 끓는 물이 아닙니다. 100도라는 경계선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요.
일설에 의하면, 오래전 미국의 마피아 보스 알 카포네의 자택을 급습한 경찰은 그를 눈앞에 두고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알 카포네는 주의 경계에 집을 지어놓았었는데, 주 경찰이 찾아왔을 때 단순히 다른 방으로 옮겨 감으로써 다른 주로 도피해버린 것이고, 그곳은 다른 주의 관할지역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체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의 법칙과 사람의 법에도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라 해서 모두 신약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오해하거나 모두 따라야 할 새 언약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되며, 말씀을 바르게 잘 구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은 사도들조차 상상하지 못했고, 그 계획조차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어지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하는 말씀이 왜 신약 성경에 들어있는지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집'을 교회나 그리스도인으로 영적 해석을 한다 해도 풀리지 않는 모순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제가 아는 분이 주변의 지식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성경과 복음에 대해 대략 기술한 것을 제게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물론 전형적인 개신교적 입장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므로 코멘트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이 뒤틀려 있었지만 그중 "교회는 왜 가야 하는가?"를 다루는 부분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담고 있었습니다."교회는 믿는 자가 꼭 가야 하는 곳이며 예수님 자신도 갔던 곳입니다."그분의 주장은 예수님이 성전에 가신 것을 말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성전과 교회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어렵지 않게 범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천주교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고, 제사장 역할을 하는 목사를 둔 채 각종 절기를 지키며 성가대를 두는 등 구약 방식의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구약의 구분을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구약 시대의 "솔로몬이 교회를 만들었다"는 식의 실수는 하지 않겠지만 신약 시대(?)의 "예수님은 교회에 가셨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주님은 교회의 주인이지만, 내 교회, 즉 신약교회를 '세우리라(I will...)'고 말씀하셨을 뿐 예수님 당시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분명히 '주의 첫날'에 교회가 모임을 가졌는데도 인정하지 못하고, "왜 태양의 날에 교회에 가느냐, 창조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신 토요일에 가야 한다"며 지금도 예수님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려는 무리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에 대해 오해하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가지고 나도 성령모독죄를 짓지 않았는지 불안해 하게 됩니다.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참 자유가 없습니다. 시대를 나누고 정확히 구분하려고 하면 세대주의자라며 몰아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잘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대를 나눈다고 해서 모든 것의 경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신약이든 구약이든 어느 시대에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글쓴이 : 김재욱 형제. 출처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889#c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