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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도시 이야기 1: 알렉산드리아 - 비유해석의 신학적 배경도시
새우물침례교회
2023. 8. 19. 23:33
세 도시 이야기 1: 알렉산드리아 - 비유해석의 신학적 배경도시
● 알렉산드리아 아프리카 대륙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도시입니다. 이 항구 도시는 성경에서 ‘함의 땅’으로 알려진 땅 입니다(시105:23).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설립한 이 도시는 점점 더 커지면서 고대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주전 1세기경에는 인구가 거의 백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제가 영토를 확장하고 죽은 뒤에 그의 왕국은 시리아의 셀류시드 왕국과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끼여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고 특히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대왕 통치 때에는 유대교 탄압 등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들은 곧바로 유대교와 그리스의 인본주의를 결합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해석하며 자기 생각대로 성경을 뜯어고친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한 사람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필로라는 유대인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유대주의와 플라톤주의를 혼합하여 구약성경을 모두 비유로 해석하는 학문 체계를 수립하였고 오늘날 비유 해석의 아버지라 불리웁니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실 필로는 유대 신학자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자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그는 자신의 그리스 철학을 세우기 위해 단순히 구약성경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상이나 철학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이 기초를 세운 ‘영적 비유 해석: 성경의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거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이라는 명목아래 모든 것을 비유로 해석하는 것’을 이용하여 구약성경을 왜곡시켰습니다. 그의 이런 ‘영적 성경 해석 방법(일명 영해라고 하며, 뜻만 통하면 된다는 동적일치기법 이라고 명명하기도 함)’은 주후 2-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교는 주후 2세기에 판테누스라는 사람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되었으며 그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로 이어집니다. 이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의 비유해석을 으뜸으로 여겼고 그것만을 강조했습니다. 이 학파에서 학문과 철학과 업적 등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리겐(오리게네스)이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같은 세속 문헌도 다음과 같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학문 연구를 위해 2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최초의 그리스도교 학파. 최초의 유명한 지도자들 - 판테누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 - 아래서 이 학파는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절충하는 사상을 따랐으며, 교리의 변화가 심한 시기에 이단적인 주장들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확립하려고 애썼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한 학파는 안디옥 학파로서 이 학파는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주장했다." ● 오리겐의 영향 그는 그 자신의 독특한 교리로 인해 바르지 못한 성경학자라는 오명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부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창조되었고 성령님은 성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그분께 복종한다고 가르쳤습니다(그래서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고, 이 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의 교리 정립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주었다[뉴스탠다드 백과사전 제9권].). 또한, 그는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며 비성경적인 유아세례를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귀들도 충분히 형벌을 받은 뒤에는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와 복종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한편 그는 필로의 ‘영적 비유 해석 방법’을 동원하여 신약성경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가르쳤는데 사실 그는 이런 잘못된 해석을 통해 위에 열거된 이상한 교리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오리겐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된 그리스어 본문을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본문이라 하는데 현존하는 두 개의 사본이 이 본문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1844년 시내 산 수도원 쓰레기더미에서 티센도르프가 발견한 시내 사본(Aleph, 알레프)과 1481년 로마 바티칸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바티칸 사본(B)이 여기에 속합니다. 바로 이 두 사본이 1611년 이후에 나온 현대 역본들에서 삭제된 부분들을 정당화시켜 주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리겐이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구성한 독본을 지지했으므로 현대 학자들은 현대 역본들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부패된 본문’의 증인으로 주저 없이 그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오리겐이 죽은 뒤에도 알렉산드리아는 신약성경 본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알렉산드리아 본문은 학자들에 의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출처 : 정동수(2012), 개역성경분석, 인천 : 그리스도안에, pp.1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