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킹제임스 성경이란?

이미지로 보는 '개역성경 VS. 흠정역' 단어 비교

새우물침례교회 2023. 8. 18. 23:40

이미지로 보는 '개역성경 VS. 흠정역' 단어 비교

이미지로 보는 '개역성경 vs. 흠정역' 단어 비교
 
김재욱 작가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접해 온 개역성경에는 한국적인 단어들이 꽤 있다. 사람들이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번역했기 때문일 텐데, 이해가 빠르다는 장점도 있지만 성경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예전에 글로만 이와 비슷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하단 참조), 이번에는 이미지와 함께 비교해 보았다. 개역성경과 흠정역의 차이점을 강의할 때 보여 주는 사진들인데, 치명적인 오류들은 아니고, 그저 알아두면 될 만한 단어들이다. 개역성경을 공격할 의도는 없지만 바꿀 것은 좀 바꿨으면 하는 생각은 늘 있다.

제시한 킹제임스 흠정역 구절의 영어는 모두 킹제임스 영어성경의 단어이며 개역성경의 영어는 현대역본의 대표격인 신국제역(NIV) 영어성경의 단어이다.


 
떡 vs. 빵

떡은 떡이고 빵은 빵이다. 19세기 조선인에게는 빵이 익숙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스라엘에는 떡이 없었고, 무엇인지도 몰랐다. 이스라엘의 빵은 피타, 할라 등이 있고, 유월절과 주의 만찬에 먹는 누룩 없는 빵 마짜가 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에 나오는 '병'은 떡 병(餠) 자라서 개역성경의 무교병, 진설병 등은 다 떡인 셈이다. 흠정역은 떡을 빵으로, 무교병과 진설병은 각각 '누룩 없는 빵', '보여 주는 빵'으로 번역했다. 좀 어색하지만 뜻은 바로 전달된다.





왼쪽은 시루떡, 오른쪽은 이스라엘의 빵 피타와 누룩 없는 빵 마짜(오른쪽)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4:4. 흠정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 4:4. 개역개정)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가 빠졌다(마태복음에는 있음).

한편 개역성경은 신구약 전체에서 빵(bread)을 떡으로 번역했다.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창 40:22, 개역개정)

자기가 만든 별미와 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창 27:17, 개역개정)

또한 '보여 주는 빵'도 성경 위치에 따라 '진설병'과 '진설하는 떡'으로 다르게 번역해 한 단어를 검색했을 때 다 나오지 않도록 했다. 단어를 바꾼 현대역본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너는 그 상 위에 보여 주는 빵(shewbread)을 두되 항상 내 앞에 둘지니라. (출 25:30, 흠정역)

상 위에 진설병(bread of the Presence)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출 25:30, 개역개정)
 
또 그들의 형제들 중에서 곧 고핫 족속의 아들들 중에서 다른 이들은 보여 주는 빵(shewbread)을 맡아 안식일마다 그것을 예비하였더라. (대상 9:32, 흠정역)
 
또 그의 형제 그핫 자손 중에 어떤 자는 진설하는 떡(bread set out on the table)을 맡아 안식일마다 준비하였더라 (대상 9:32, 개역개정)
 

 
면류관 vs. 관

면류관(冕旒冠)도 무척 익숙한 단어다. 이 단어만으로도 감격이 느껴질 정도로 한국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단어인데, 이 역시 이스라엘에는 없는 물건이다. 한국과 중국 등에서 쓰던 것으로 사각형 모자에 구슬을 매단 통치자의 의관이다.
이 면류관은 성경의 크라운(crown)인데, 크라운은 씌우는 '관'이다. 치과의 크라운 치료도 금속의 관을 씌우는 방식이다. 재질에 따라 월계수관, 금관 등으로 부를 수 있는데, 계시록에는 금관이 나온다. 왕이 쓰면 왕관이다.



면류관과 왕관

성도는 왕가의 제사장이 되어 왕과 동등한 존재가 되며,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이 되므로 관을 얻는다.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께서 앉으셨는데 그분의 머리 위에는 금관(crowns of gold)이 있고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이 있더라. (계 14:14, 흠정역)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crowns of gold)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계 14:14, 개역개정)

<면류관 가지고>라는 찬송은 휴거 후 하늘에서 24 장로가 받은 관을 주님 발 앞에 던지며 우리의 공로가 아님을 찬양하는 장면이다. 이제 '면류관'은 관용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표현이니 대한성서공회가 고치지 않는 한 하나의 크리스천 문화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2012년 이후로 나온 개역개정은 계시록 4장의 '면류관'을 '관'으로 바꿨다.

스물네 장로가 왕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관(冠)을 왕좌 앞에 던지며 이르되,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계 4:10~11, 흠정역)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0~11, 개역개정)

하지만 바꾸려면 위의 14장도 바꿔야지, 예수님이 쓰신 것은 '면류관'이고 성도가 쓴 것은 '관'이란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에도 '면류관'이 나왔었는데, 이 부분도 개역개정은 '관'으로 번역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crown)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고전 9:25, 흠정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crown)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개역한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crown)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개역개정)

'썩을 면류관'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어서 바꿨는지 모르겠는데, '썩을 승리자의 관'은 또 뭔지.... 아무튼 '관'으로 바꾼 것은 잘한 것이지만 다른 곳의 면류관을 다 그대로 두면, 영어로 crown을 검색했을 때의 단어 수와 면류관을 검색했을 때의 단어 수가 달라진다.


 
대접 vs. 병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대접의 '대접'도 물론 우리나라 물건이다. 원래는 목이 있는 '병'이다. 여기 나오는 병은 바이알(vial)이다. 약병 같은 것으로 코로나19 백신 때문에 바이알이라는 명칭이 매스컴에도 가끔 등장하는데, 바로 그런 병이다.
옛날에도 술병이나 물병 등 도자기도 있었는데 왜 대접이 됐을까. 재앙을 병으로 붓는 것은 좀 시시해 보여서였을까? 이것은 vial 대신 볼(bowl)을 쓴 현대 영어 역본들을 참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볼은 샐러드볼처럼 넓은 그릇이다.

일곱째 천사가 자기 병(vial)을 공중에 쏟아 부으매 큰 음성이 하늘의 성전에서 왕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다 이루어졌도다, 하더라. (계 16:17, 흠정역)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bowl)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계 16:17, 개역개정)




왼쪽은 볼과 대접, 오른쪽은 병 모양의 바이알

바이알은 세밀하게 약을 제조할 때 쓰는 병이다. 하나님의 재앙도 정확한 위치에 쏟아부을 수 있는 정교한 것이다. 무엇으로 붓는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재앙인지가 중요하겠지만, 한국에 있는 '대접'보다는 '병'이 이해가 빠르고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광주리 vs. 바구니

복음서들에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후에 열둘 혹은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다. 여기 나오는 광주리 역시 우리나라 물건이다. 이것은 그냥 '바구니'가 맞는다. 자기 먹을 것을 내놓은 소년이 가지고 있었듯이 휴대용 도시락을 담는 용도다. 광주리 하면 대개는 아래 사진에 있는 것처럼 큰 것을 떠올리기가 쉽다.

물론 광주리도 작은 사이즈가 있고, 바구니도 큰 사이즈가 있다. 바울도 바구니에 담겨 성벽을 탈출했다(행 9:25). 이 부분도 개역성경은 광주리로 번역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열두 바구니가 남은 것에 대해, 배식하느라 수고한 제자들에게 돌아가 가족들과 먹도록 주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식 광주리로 열둘이나 남았다면 너무 많다. 예수님은 배식에 실패하신 것인가???





왼쪽은 흔한 광주리와 베트남에서 하는 광주리 투어 모습, 오른쪽은 소년이 물고기와 빵을 예수님께 드리는 삽화와 바구니 이미지.
 
그런데 여기서도 개역성경은 광주리와 바구니를 섞어서 번역하고 있다. 현대역본에도 이것은 다 바스켓(basket)인데 왜 통일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마 15:37, 개역개정)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막 8:19, 개역개정)


 
배낭 vs. 짐 보따리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나오는 짐이 있는데, 킹제임스 영어성경에 있는 스크립(scrip)이라는 단어를 현대역본은 백(bag)으로 번역했고, 개역개정은 배낭으로 번역했다.

여행을 위해 짐 보따리(scrip)나 덧옷 두 벌이나 신이나 지팡이들을 준비하지 말라.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 10:10, 흠정역)

여행을 위하여 배낭(bag)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 10:10, 개역개정)

2012년 이전의 개역한글은 '주머니'라고 했었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 10:10, 개역한글)

그런데 여기 여행은 유람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복음을 선포하는 길인데, 배낭이라고 굳이 개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배낭은 말 그대로 백팩, 한자로는 등에 지는 주머니, 등짐이라는 뜻이다.



왼쪽은 배낭, 오른쪽은 스크립이라 부르는 순례자의 어깨 가방이다.
 

이런 단어는 굳이 현대의 어떤 물건이 떠오르는 번역이 아니라 '짐 보따리' 정도로,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소한 차이겠지만. 
 
몇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지만 이해에 방해가 되는 번역이 개역성경에 꽤 있음을 알수 있다. 하지만 대접이나 떡, 면류관, 배낭 등 단어 자체의 문제보다는 일관성 없는 번역과 새로운 판이 나올 때 땜질 식으로 수정을 해서 단어의 통일성이 성경 전반에 반영되지 않는 점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아마도 어떤 단어에 대한 지적이 나오면 바꾸는 것 같은데, 해당 단어에 대한 고민이나 독자의 입장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저작권 기한이 끝나면 누구나 성경을 인쇄할 수 있으니 새로운 판으로 다시 독점하려는 의지가 아니었겠나 싶어 씁쓸하기만 하다. 부디 말씀을 두려워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번역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